개요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 후 8년)은 고조 유방이 항우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건국
고조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거듭 패배하였으나 한신, 장량, 소하를 위시해 많은 인재를 기용하여 기원전 202년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고 최종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한을 건국했다.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다.
전성기
문경지치(文景之治)로 일컬어지는 문제, 경제 시기의 전한은 내실을 다지는 데에 주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제 시기에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다. 무제는 장건, 위청, 곽거병을 등용하여 변방의 흉노를 물리치고 동월과 남월, 또 조선을 정복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 전한 문제
한 태종 '효문 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기원 후 157년 6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제위: 기원전 180년~기원 후 157년)이다. 고제의 사남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즉위 전 대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효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 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치지를 이룩하였다.
즉위 전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스스로 대 나라 왕(代王)을 일컬으며 한나라에 모반을 일으킨 진희가 고제에게 결정적인 패전을 당한 후 대 나라 왕으로 봉해졌고 태원군을 더 받아 태원군 진양현(지금의 산시 성 타이안 시)에 도읍을 두었다가 얼마 후 중도현(지금의 산시 성 핑야오 현)으로 옮겼다. 왕후 왕 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고, 사랑하는 첩 두 씨(효문 왕후)에게서 계, 무 두 아들을 두었다. 적모 여태후와 그 일족이 통치하던 여태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후사가 끊긴 조공왕 유희 사후 조왕 후보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대 나라에 머물렀다. 여태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고 주발, 진평, 제애왕, 성양경왕(당시 주허후)등이 여씨 세력을 토벌하면서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원래는 제애왕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었으나 유택 등의 대신들이 제애왕의 외가 사씨가 여씨와 같이 될 것을 꺼려 어머니 박 씨의 세력이 약한 대왕이 추대되었다.
문경의 치(文景之治)
문제는 인군으로 안전과 검약을 실천하였다. 후세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나의 정치과 과연 한의 문제만 한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에 옮긴 현군이다. 특히 문제의 통치철학은 한 초에 유행하였던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 사상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리하여 진의 시황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위적인 무리한 정치를 피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순링 따라 정사를 펴 나갔기 때문에 진시황제 이래 혹독하게 시달려 오던 백성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주의 정치가인 가의(賈誼)가 건의 하 치안책은 문제의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정책면에서는 고조 시대의 지조인 15분의 1세를 30분의 1로 감축하였고, 만년에는 토지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백성의 요역을 경감하고 진 이래의 악법인 연좌제와 신체에 고문을 하하는 육형을 폐지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를 통해 문제 시대에는 이전 과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의 통치는 중국 역대의 절대군주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대외 원정이나 대토목 사업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인위적인 정치가 아니라 무위의 정치로 백성을 쉬게 한 안정화 정책이었다. 일례로 BC.174년에 있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박사인 가의나 조조는 중앙 정보를 강화하고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는 강간 약지 정책(強幹弱枝政策)을 내세워 제후황의 영지를 삭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후국과의 힘 겨루기로 이어져 애써 이룩한 민생의 안정을 흔들 것으로 판단하여 제후 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종래의 군국제를 유지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도 대체로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리하여 문제, 경제 재위 40년간(BC180~BC141)의 안정화 정책으로 황폐한 농촌사회는 휴식을 취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켜 국력이 회복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경 시대의 사회적 번영과 경제력의 회복은 다음에 오는 무제(武帝) 시대의 막대한 국가운영과 대외 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 재정과 군사비 조달의 배경이 되었다.
※ 전한 경제
한 효경 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기원전 141년)는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 황후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선정을 행하여 [문경 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또한 후한 왕조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시대 촉의 창시자 유비는 자신들의 조상을 경제의 태자라고 칭했다.
생애
치세 초기까지
<사기>외척세가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4명이 모두 문제가 대 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80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 씨가 문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가 되었다. 유학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 두 씨로부터 도교를 배웠다. 황태자 시절 오왕 비의 세자 현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는데, 이 문제로 한의 중앙 정부와 오왕의 관계가 냉랭해졌으나 문제의 정치적 배려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으며,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5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경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정치를 이어받아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농 정책을 펼치고 세금을 줄이는 등 사회 안정을 실현시켰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조의 인구 90%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치세를 문제의 치세와 함께 [문경치지]로 칭송하기도 한다.
오초칠국의 난
경제의 치세에, 한의 황족, 종족으로서 봉해진 유 씨의 제후왕이 그 영내의 징세와 관리 임명권 등을 장악하여 그들의 분국은 거의 독립국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조정은 단지 제후국의 승상만을 임명할 뿐이었다. 문제 때부터 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대응은 소극적인 데에 그쳤고 (문제 자신부터가 제후 왕 출신으로서 황제가 되었다.) 근본적인 대책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방침을 이어받으면서도 분국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사대부 조조의 헌책을 받아들여 제후 왕의 권력을 줄이는데 착수했고, 제후 왕의 사소한 과실을 이유로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이에 반발한 제후 왕이 몰래 연계, 기원전 154년 오왕 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오조칠국의 난),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했으나, 주아부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뒤 경제는 제후국의 승상을 폐지하는 대신 상(相, 제후상諸侯相)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고, 제후 왕에게는 현지에서 징수되는 세만을 받았다. 당초 계획했던 제후 왕의 권력 삭감에 성공한 것이다.
중앙집권 강화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주아부는 이후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갈등으로서 승상에서 해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의 측근 위관이 승산으로 임명되었다. 전한 최초로 황제의 측근이 승상으로 임명되었다. 전한 최초로 황제의 측근이 승상으로 임명된 것은 종래 황제의 정책에도 제약을 가할 권력이 주어졌던 원훈들과 그 일족에서만 임명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던 승상의 권력이 이때에 와서 크게 저하하고, 반대로 황제의 군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 대응력과는 반대로 내세와 불로불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경제의 능묘에서 발굴된 호화로운 부장품은 한조의 공식 기록에 나오는 <질소검약>과는 대치되는 것으로, 사망자에 대한 경제적 지출이 허용되었던 사치스러운 시대였음을 방증한다.
경제에게는 박황후가 난 적자가 없었다. 이에 태후 두 씨는 경제의 아우인 양왕 무를 다음 황제로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조모인 태황태후 박 씨가 기원전 155년에 죽자, 기원전 151년, 경제는 황후 박씨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재위 15년째인 기원전 14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멸망
무제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은 결국 권력투쟁까지 했다. 그중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섭정하여 그 위세가 득에 달했고 결국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은 국호를 신이라 하고 제위에 올랐고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방계 후손 유수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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