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중국의 고대왕조: 후한

chinatoktok 2020. 12. 8. 06:08

개요

신나라의 멸망 이후로 혼란기를 거쳐서 전한을 명실상부 계승한 국가. 건국자는 광무제 유수(劉秀).

 

중국에서는 오대 십국 시대  후한과의 구별을 위해, 수도 낙양의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는 점에 착안하여 '동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중문 학계, 철학계 등에서도 서한, 동한(통칭으로 양한)으로 자주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사학계와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개 전한, 후한 (한대(漢代) 내지는 양한)이라고 한다. 학술적으로 봤을 때에는 동한/서한으로 구분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게, 역사상에서 비슷한 케이스들은 모두 동주/서주, 동진/서진, 남송/북송 이런 식으로 불려졌고, 그 외에도 원나라를 이은 북원, 명나라를 이은 남명 등의 케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한나라만 전한/후한으로 부르는 건 일관성이 없기도 하고, 오대 십 국 시대에도 후한이라는 정권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조금 마이너 하지만 남북조 시대 후경이 세운 정권도 후한으로 부르는지라 혼동이 생길 수도 있다. 

 

상세 

원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나오기 전에 현한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잘 언급이 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개국이 25년이 아닌 23년이라 봐도 무방하다. 

 

현한 경시제 유현의 밑에 있었던 유수는 유현 휘하에서 세력을 키우다 하북 지방에 정착하며 세력을 넓혔고, 25년 6월에는 국가를 건국해 도읍을 낙양으로 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그 뒤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유현을 살해한 적미 군을 격파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36년에는 촉 지방에서 할 거하던 공손술을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수는 한경제의 6대손이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약하다보니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양 인근의 호족들과 연합 정권을 세웠다. 이는 전한이 건국된 직후에 공신 세력을 숙청해서 강력한 황권을 확립한 것과 달리 호족 세력이 공신으로서 정치에 관여하는 바탕이 되었고, 아울러 이들이 혼인 관계를 맺어 이들이 강성한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이 된다. 

 

후한은 환관인 채륜이 초기 형태의 종이를 실용성 있게 대폭 개선한 채후지를 만들었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매우 번창했다. 또한 반초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 길을 열어서 실크로드를 다시금 개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4대 황제인 화제부터는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화제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일찍 붕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권위가 불안정해진다. 이 같은 어린 황제 현상의 시작은 상제 유융이었는데, 그는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황제가 되었다가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황제가 자주 바뀌는 와중으로 황태후가 정치를 장악하면서 환관과 외척이 권력을 잡다가, 결국 환관이 위세를 얻으면서 정치는 더욱 타락하고, 당고의 금 등으로 유학자들에게 신망을 잃으며, 게다가 암군인 영제가 국고를 채우기 위해 군주가 스스로 매관매직을 하는 등 망조가 보이니까 민심이 피폐해지고, 마침내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켜서 멸망으로 이어졌다.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후한 조정이 직접 진압할 능력이 없다보니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자율성을 크게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쌓으면서 사실상 군벌 화가 이루어졌다. 광역 행정 단위인 주의 장관으로서 감찰의 업무를 맡은 주자사가 임명되었던 초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행정, 군사 등 전권을 행사하는 주목이 설치되어 이러한 군벌 화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앙 조정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중앙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조정의 분란을 명분으로 하여 거의 모든 지방관들의 이반으로 국가가 공중 분해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 이 같은 후한 말기의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 

 

사상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약탈하는데 이용한 부명의 예언설이나, 광무제가 한실을 부흥하기 위하여 광범 위하게 활용한 도참은 각기 준거할 곳을 유가 경전에서 구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미 전한 말에는 음양 5 행설(陰陽五行說)을 원리로 삼는 갖가지 천인 감응 사상에 의하여 유가의 경서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시류의 유자儒者)는 한층 권력에 영합키위해 공자의 저작으로 가탁한 위서(緯書)를 만들어 경학을 신비주의로 감쌌다. 

 

기원후 56년 광무제가 도참을 천항 공포하고, 장제가 79년 학자를 백호관으로 모아놓고 5경의 국정 해석을 토의시켜 전한 이래의 금문(今文) 학의 우위를 보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 정권에 활용되었던 고문(古文) 경학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접근하고 있었다. 금, 고문의 차이는 금문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로 한 왕조의 정책 운용에 적응한 이론을 제공하여 학관을 독점해오고 있었는데 반하여 고문은 복고주의를 주창하면서 고대 성현의 이상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5경을 종합하는 텍스트의 언어 해석을 기초로 한 해석학을 확립시켰다. 유흠, 가규, 반고와 같은 학자들은 고문의 경전이 도참의 불비를 보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모시(毛詩)>등을 국가에 공인시키려고 한 운동을 격렬하게 일으켰으나 대게 이 학문의 본령은 민간 사학에서 발휘되었다. 

 

후한 때에는 일반적으로 '녹리(祿吏)의 도(道)'가 개방되었으므로 유생들이 다투어 경학을 배워 금고문에 능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분 질서를 중하게 보는 계급 사상과 그 실천인 예를 존귀하게 여기는 명절(名節)의 기풍이 넘치게 되었다. 대략 명, 장, 화의 3제( 三帝, 58~105) 시절에 예교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당시의 지식인의 언행은 점차로 관료 후보의 예비 공작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금고문 두 학파의 논쟁이 체제 교학(體制敎學)의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학술의 기운이 사법을 준수한 전한의 일경 전문으로부터 5경 겸학으로 진보하고, 다시 금문, 고문 양 경학을 겸습하여 절충하고 총합하려고 하는 학자가 나타났다. 가규와 허신 등이 그들이다. 후한 말이 되어 하휴(何休, 129~182)는 훈고의 형식에 의하여 춘추학을 완성시켰고, 정현은 참위설도 살려가며 금고문의 예학을 통합함으로써 위진 이후의 경학의 일대 종주가 되었다.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중에 지배권력의 의사를 거슬려서 천인감응의 참위설을 부인하는가 하면 음양오행설을 신봉하는 모든 학설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돌려댄 지식인들이 출현하였다. 환담에서 시작하는 무신론자 계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으로 그런 것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왕충을 필두로 왕부, 중장통이 계속 나왔다. 왕부는 그의 <잠부론>에서 빈부를 사회적 근원부터 추구하여 유법 양면에서 사회비판을 행하였고, 중장통은 <창언>에서 신권적인 왕조 순환 사관을 비판하며 지배자의 철학에 각각 준열한 타격을 주었다. 

 

황실의 붕괴 

십상시의 난 이후로 양주 지역에서 이민족인 강족과 한족이 결합된 강력한 군세를 이끌던 동탁이 일전에 하진의 입경 요구에 호응하여 낙양 인긍에 와있다가 난을 틈타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탁은 오래지 않아 정원을 죽여 그의 병사를 흡수하여 군권을 장악하였고, 조정에도 사공이 되었다가 태위로 관직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소제 유변과 하태후를 살해하였고, 왕미인 소생의 헌제를 옹립하여 명실공히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잉 반발한 세력이 반동탁 연합을 결성하여 그와 대적하였고, 이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장안 천도 이후 동탁이 살해되자 그 부곡이었던 이각과 곽사가 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마침내 조조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정권을 휘두를 때 부터 후한 황실은 그저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협 천자 이령 제후(挾天子以令諸侯 =천자를 끼고 그를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을 호령한다)이다. 

 

조조는 천자를 명분으로 삼아 각지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토벌하였지만, 각지의 군벌들은 오히려 조조가 천자를 위협하는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항하였다. 결국 조조가 지배한 북중국, 유비가 지배한 사천성 일대, 손권이 지배한 강남 일대 등 지배 영역이 셋으로 나뉜 상태로 고착되었다. 

 

조조 지배 지역에서 식물 인간 상태에서 유지되는 후한 조정은 이 상황에서 전혀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결국 220년, 헌제가 조조의 아들인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으로 위장한 찬탈을 당하면서 붕괴되었다. 

 

평가 

냉정하게 보면 아예 건국 황제인 광무제 정도에서 잘 쳐주면 3대 황제인 장제나 화제 초반 제위 시기 정도에서 뭔가 '정상적인' 느낌은 다 끝나고 그 뒤로는 틈만 나면 황제들이 

 

  • 어린 나이에 제위 -> 그런데 갑자기 급사! 
  • 갑자기 '병'으로 사망 
  • 멀쩡히 적장자 있는데 건너 뛰고 황제에 등극하더니 얼마 안 있어 사망 
  • 이런 사망자 중 독살이 의심스러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거기다 궁정에선 

 

  • 다른 후궁들 자식 뺏어오고 친모는 독살해 버리기, 
  • 황제의 유모와 황태자의 가정교사 등이 권력 다툼하기, 
  • 외척에 후궁에 환관들이 편 붙어먹기

등등 궁중 암투 사극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왕조였다. 

 

태생적인 문제인 강성한 호적들은 그나마 가장 황제의 권위가 강력했던 광무제 때 조금 건드리려고 하다가 호족들이 반발하니 금세 꼬리 이후로는 건드리려는 시도도 못했고, 정부 조직을 간소화해서 황제들의 직접적인 권위 행사를 늘리려고 하니 그 뒤로는 다들 귀신 같이 빨리 죽어버렸다. 그래도 광무제는 혼자 정신 나간 먼치킨이라 괜찮았지만 문제는 나라 재건하느라 호적들 힘이 강해졌고 말기인 환제와 영제 시대엔 호족들과 사류를 탄압하면서 황권을 마구 휘두르며 환관 힘이 커졌다는 건데 이건 광무제 탓이라기엔 이미 망한 전한 탓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도 광무제, 명제, 장제까지는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 시대였다. 그리고 환관 관리만 잘했어도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환관 권력이 비대해진 근본적인 원인이 안정 양 씨의 비대한 권력 때문인지라... 

 

그 외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도 전한이 화려함에 협기가 섞여서 위풍당당함 같은 게 있다면 후한은 기개 있는 사람들은 느껴진다 쳐도 전체적으로 초라하다. 화려했던 영광 이후 왕망 정권 붕괴 당시의 세상이 끝장나는 듯한 대혼란이 끝나고 다들 그냥 초라하고 근근하고 퍽퍽하게 하루하루 사는 인상. 심지어 반고가 전한의 장안과 후한의 낙양을 비교하는 시를 보면 후한 사람들 본인들조차도 전한 시절에 비해 지금은 초라하다는 인상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아마 흉노의 분열이라는 천행으로 외부에게 핍박받은 느낌이 덜한게 그나마 도움이 된 듯하다. 두 씨 일족 같은 사람들이 퍼포먼스 하려고 군대를 동원해서 연연산까지 가도 별로 저항할 수가 없던 게 당시 흉노의 현실이었다. 

'중국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고대왕조: 송나라  (0) 2021.01.07
중국의 고대왕조: 당나라  (0) 2020.12.26
중국의 고대왕조: 전한  (0) 2020.12.07
중국의 고대왕조: 진 (통일왕조)  (0) 2020.11.24
중국의 고대왕조: 수나라  (0) 2020.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