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원 전 1040년 즈음에 멸망한 상나라를 이어, 약 기원 전 1100년 부터 기원 전 256년까지 중국에서 존재한 고대국가다. (기원 전 1100년대 ~ 기원 전 256년) 통칭 희주(姬周), 중국의 인문주의, 천(天)사상 그리고 세계 체제 등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주나라'라고 하면 이 나라를 가리킨다.
역사서 사기에 따르면, 사마천은 기원 전 841년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가 기원 전 841년에 주목했던 이유는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厲王)이 쫒겨나고 기원 전 841년 부터 828년까지는 공백화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공화시대라고 칭한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았고 사기에 12제후 연표를 세웠는데, 이 시점부터 연대에 따른 기록은 상세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원 전 841년은 중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다.
한편 문헌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발굴의 성과에 따르면, 대략 기원 전 1040년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은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고 대략 기원 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은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고 대략 기원 전 1040년 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주나라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가 기록된 청동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문자로 구성된 기록과 더불어 그 당시 관측되었던 천문 현상도 함께 병기 되어 있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록된 천문현상의 날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중국 내외의 수 많은 학자들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찌를 연도(무왕극상년)를 추정하고자 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여러 신빙성있는 학설들은 기원 전 1100년대를 집중적으로 지목하나, 다른 연대를 추정하는 학설들도 여럿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하여 주의 건국 연대를 기원 전 1046년으로 산정하였으나, 무왕극상년 외에도 주나라 왕들의 재위 기간에 대한 추정은 쇼우네시 등 구미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맞지 않으므로 공정에 참여한 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인 학자들 그리고 서양 학자들 간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봉건제도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무왕은 개국 초부터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만 등의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봉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고 주 황실을 지키게 했다. 봉건 제도의 기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존재하고, 순서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으로 이루어진 오등작을 유력 세력들 왕 사이의 친밀도, 전략적인 중요성, 군공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그들을 수순에 맞게 책봉했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후들, 즉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들은 국(國)을 수여 받았다. 이후 제후들도 내부의 공신들을 책봉하였는데, 이들은 경(卿) 혹은 대부(大夫)로 불렸으며, 가(家)를 수여받았다. 다시 가 내부에서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서 사(士)계층이 생겨났고 (다만 사계층은 최하위 계층이었던 만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식읍 정도를 수여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주 대에는 읍(邑)이 행정의 최소 단위였으므로 더 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주나라의 분봉은 주왕실 일족(동성제후)가 약56개국, 그렇지 않은 귀족(이성제후)가 약70여개국으로 추측된다. 각 제후국은 중심지인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 국가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 국가가 아니었다.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국 이었다고 추산된다.
한편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이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에서는 주나라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이것이 제후의 영토가 제후국으로서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제 하에서 제후국의 제후들은 왕으로부터 분봉받은 직할지를 다스리고, 분봉지를 동맹세력이나 일족에게 세습하였다. 왕은 그에 대한 대가로 제후국으로 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씨족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종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이는 곧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자식들은 대종이고 왕의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원친은 제후, 대부, 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그러한 틀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권위가 유명무실화 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내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역사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조협을 주(邾)땅의 제후로 봉하였다. 노나라와 이웃하며, 노나라에 의해서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환공의 위세로 군사 원조를 보내거나 희맹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입지가 불안했던지 수도를 비, 추, 등, 제년, 금향 등으로 전전했다. 추(鄒)땅으로 이주하고 국호를 추나라로 개명했다. 전국시대 초, 중기 초나라에 병합되었다. 두가지 역사적 의의가 있다. 첫번째는 '맹자'가 태어난 곳이며 두번째는 '조조'와 '조참'이 나라 제후의 후손이었다.
정치
주의 여러 제도에 대해 주공 단이 엮었다고 여겨지는 '주례'에 주나라의 관제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술이 있지만, 이 서적이 집필된 시대는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므로 이것 만으로 주의 관제에 대해 논하려면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더불어 금문에 의하면 주에는 경사료, 대사료로 불리는 2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 태사의 2개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 그 밑으로 사마(군사담당), 사토(토지관리담당), 사공의 관직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관직이 있었다. 대사료의 장관을 태사라 부르고 역사의 편찬 및 각종 의례와 제사 등을 관장하였다.
주나라의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왕 아래에 제후가 있고 그 아래에 대부로 불리는 일종의 귀족층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 사(士)로 불리는 지식인 층이 있고 그 아래가 서민이었다. 그러나 대부와 사라는 계급은 금문에는 없다. 더불어 재산의 일종이었던 노예계층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이들은 주로 주인을 대신하여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다. 더 나아가 노예 계층 안에는 직공이라고 생각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청동기의 주조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토지 제도에 대해서는 주나라는 정전제를 실행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기타
후대에는 주나라를 야만족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남북족 시대에는 '희한 구국, 불임 이류'(서리와 이슬이 고루 섞여 있어 잡종이 없다)고 말했다. 희지는 주나라를 가리켰다. 옹정이와 함께 쓴 철봉 작품 대의각 미록에는 순동이, 주서이라고 쓰여있다.
중국인들이 이적을 중국에 들여보내자는 취지였지만 순화는 절대 이적이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순의 성씨는 야오, 화하의 상고팔성 중 하나이며 황제의 8대손이다. 주나라의 성은 희이고, 화하의 상고팔성은 황제의 자손이다. 희수에서 태어나 희를 성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온정이는 화하의 전적에서 문왕 서이의 사람이라는 말을 빼내다가 국어를 썼다.
'중국 이적론'은 이런 순결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중국인은 없고, 모든 중국인은 이적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이런 괘변을 늘어놓는 것은 중국을 허무화하고 이류의 중국 침공과 중국 지배에 대한 여론몰이에 불과하다. 주한당 송명조에 이적 혈통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일부 이족 정권과 관련이 있다. 본직적인 차이가 있다. 한 가지는 이적이 화하(華夏)에 녹아든 후, 중국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적이 중국을 침공한 후, 중화 광복으로 이족 통치가 파괴되고 이적이 산복하여 화하에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일인데,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고의로 혼동하고 있는 듯 하다.
그 외 정보
- 주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상나라에 이어 3번째 왕조로써 중국 고대 역사 상 가장 긴 800년 이라는 후대를 두고 강자를 등에 업고 800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서주는 분봉제와 종법제를 채택하였다.
- 종법제의 분봉제로 인해 전국적인 영토분봉제가 연계되어 제후국가와 주천자는 복잡한 의무-권력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적대시해 국력을 소모했다. 각 제후국의 실력이 약화되면서 종주국이 이들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적대시해 국력을 소모했다. 각 제후국의 실력이 약화되면서 종주국이 이들 제후국을 손아귀에 넣고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주왕조가 태산처럼 안정되어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시대의 변천과 제후들의 쟁패 후기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봉건왕조인 진나라가 세워지면서 주나라는 800년의 왕조를 가졌지만 동주 시기에 이르러 주왕실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어 명망이 실추되었다. 이것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한라라 성세의 기초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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