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중국의 고대국가. 기원 전 17세기에서 기원 전 11세기까지 존재하였다. 한자는(商).
국성은 자(子). 수도는 은허. 은(殷)나라라고도 부른다. 한때 전설 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은허 유적과 갑골 문자 기록의 발견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 국가로 인정 받고 있다.
명칭
은(殷)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은은 반경~제신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인데, 당대에는 의(衣)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은을 도시 이름으로만 쓰고
부족 이름은 상이라 하였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라 이름이 은이라 불린 것은
주대 성립부터로, 초기에는 상과 혼용하다가 후에 은으로만 부르게된다.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 (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 요즘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이는 중동의 하타이트와 비슷하다. 하타이트도 네샤에서 하투샤로 수도를 옮기는데,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기들을 네샤인이라 불렀으나 주변 국가들은 하투샤인이라는 뜻으로
하티라고 불렀다. 상인, 상업 등의 商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의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상나라는 역성혁명으로 망했지만, 주나라는 상의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무왕은 제신(주왕)의 아들 무경을 다시 은 지역에 본봉해 봉국으로 삼았다. 그게 송나라이다.
하지만 무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관숙, 채숙, 곽숙은 주공단의 섭정에 반기를 들고
무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주나라에게 진압당하면서 송나라를 봉지로 받은
미자계의 후손만 제후 신분으로 남고 나머지는 전부 몰락하고 만다. 춘추전국시대 때도
송나라는 인신공양을 벌여서 유가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볼 때, 상나라의 인습은
송나라 시절에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왕조사
전설 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에 의해 건국되었다.
성탕은 갑골문자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다만 갑골문에서는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다.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하나인 계곡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서, 삼황오제 시대와 상나라 사이에 하나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탕왕 이후 상나라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현재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은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청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우리가 아는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출토가 드물다.
기원 전 13세기의 무정(武丁)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주변 종속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부자의 과도한 동방정책
으로 서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 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만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된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의 한 명이었던
미자(微子)계(啓)에게는 공작위가 수여되고 제후국인 송에 봉해졌으며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를 계승하여 상은 송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상의 후예를 예우한
것이다. 천제께 제사 지내는 건 천자의 특권이었으나 주나라를 비롯한 당시의 인식이 아직은
모든 면에서 상왕실의 후예를 함부로 할 수 없었으며 신분을 넘어 그들의 능력과 공로를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후 송나라에서 공자의 부친이 송씨를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고 공자 또한 이 미자계의 후손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는 의고파가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갑골문의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나라의 실존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되었다.
상나라의 역대 군주는 상나라/계보의 왕사 참조.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왕 시호
(또는 이름? 존호?)는 모두 십간으로 지어져있다. 이것은 상나라가 제정일치적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순서가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도시 국가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상주단 대공정으로 고고학적으로 하나라의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중국 외부에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중국 사학계
내부에서도 이런 하상주단 대공정에 대한 비판이 있을 정도다. 이는 하나라 문서참조.
이런 주장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 왕조의 존재 자체의 근거가 희박한 상태이므로 하 나라와 다른 정치적
실체에서 상 나라로의 변화거나 단순한 상 왕조 자체 내에서의 변화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갑골문에서는 탕왕이 하 왕조를 물리친 대역사의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 왕조의 창시자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아직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夏라는 글자조차 식별되지 않으며,
갑골문에서의 1년은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다만 상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최고의 왕조이기는 하나, 상이 <사기>등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중화
대륙의 단일한 중앙집권적인 왕조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애초에 갑골문 기록에서 황하에 홍수가
나니 전 국토가 물에 잠겼다고 나왔을 정도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에 기반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상의 통치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 상의 통치 영역 바깥에는 그들이 남긴 문자는 없었지만 분명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심지어 주나라 후기인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으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성립하는 셈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시기 (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 즈임)를 거치면서 서로 교류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한 나라 때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정지었다. 이런 사실이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진 이후로는 황하
문명고 장강 문명을 합쳐 중국문명이라는 범칭으로 칭하는 것이 대세이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땅이 밀림이었으며, 그곳에는 코끼리나 코뿔소,
호랑이 같은 맹수 전설의 용의 원형이 되었을 악어 같은 대형 파충류나 붕, 짐의 원형이 될 듯한
조류가 살고 있는 험악한 땅이었다.
춘추전국 시대로 가면 황하 일대는 싹 다 전란통에 평야가 되고 장강 일대만 밀림이었다가
한 나라 이후에 개간되지만, 상 나라 시절에는 그냥 밀림 문명이 맞다. 어찌보면 하단에 나오는
그 기괴한 인습도 마야나 아즈텍 제국과 같이 밀림 문명권이라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밀림 사이에 극소수의 '성읍국가'들은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 국가는 후대의 중국 문명으로 계승되고 일부는 단절되었다.
당연히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왕조였으며 한 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렇게 하니까 정황 상 말이되네" 수준일 뿐, 하나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또한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탕왕이 천하를 제패하는
대규모의 정복전은 없었던 듯 하다. 그냥 하 나라의 패권이 상나라로 옮겨온 정도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상왕조를 전국을 통일한 국가로 인식하였을까?
사기 오제본기를 보면 천하가 9주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아도 한 나라의 행정 체계와
비슷함을 눈치챌 수 있다. 실제로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에도 사료가 극심하게 부족하여
오제본기에서 사마천이 사람들이 오제의 덕을 칭송하면서도 자료는 부족하다고 논평했다.
갑골문의 자료와 사기를 대조해본 결과, 사마천의 기록이 꽤 정확하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지만,
사마천이 입수했던 자료로는 상 나라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에 주 나라의 역사왜곡과 천하를 주유하던 세객들의 입담 및 민간전승으로 인해
상 왕조에 대해 더욱 더 골격을 잡지 못한 채 은본기를 써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의 기술과 문화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이 아로 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
상 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는데 애를 먹는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 나라 이후처럼 대량 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 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 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
기술의 후퇴라기 보다는 청동기의 용도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덕분에 주 나라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에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 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에 대한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새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는 오히려 주 나라의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 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 자주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자주 있어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 문명에도 있던
풍습으로 덕분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해골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제(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통해 상 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정보
- 은(恩), 은상(恩商)이라고도 불리는 상 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이며, 중국에는 처음으로 직접 동시대의 문자가 기록된 왕조이다.
- 하 나라 제후국 상부락의 수령인 상탕솔은 우명조전에서 여름을 끄고 박 나라(현 상구)에 상 나라를 세웠다. 후손이 반경은 (지금의 안양)을 옮기고 은상은이라고 했다. 기원 전 1600년 부터 1046년까지는 세 가지 큰 단계를 거쳤다. 1단계 선상(先商)-> 2단계 조상(早商) -> 3단계 만상(晩商)으로 17대 31왕을 전후하여 600년간 이어졌다. 마지막 왕인 상 나라 주왕과 목야전은 주무왕에게 밀려 죽었다. 상 나라는 노예제가 한창일 때, 노예주 귀족은 지배계급으로 거대한 관료 통치기구와 군대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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